남편을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 처음 본 느낌은 못생겼지만 환하게 웃는 반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평소 이성친구들과도 동성친구들처럼 편하게 대하고 이성적인 만남이 될 것 같으면 철벽을 치고 인연을 끊는 차가운 여자였고 남자를 사귀는 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남편의 일방적인 관심도 그저 흔하고 뻔할 것 같은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던 어느 날 남편은 한결 같이 나의 불편함을 예리하게 살펴보고 필요한 물건을 말없이 두고 잇몸이 보이고 반달눈이 되게 크게 웃고 있었다.
이날 아르바이트 끝나는 마지막 날이 여서 남편에게만 마지막 날이라고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남편이 네게 관심을 보여서 인연이 되고 싶지 않아서 아르바이트 일을 끝내고 전철역에 도착했을 때 가방 안에 지하철정액권을 찾다가 쪽지를 발견했다. 남편이 네게 지하철 입구에서 만나자는 글이 있었고 왠지 얼굴보고 싫다고 해야 할 것 같아서 두리번거리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남편이 나를 보고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고 하는 말에 어차피 만날 일 없는데 예상과 다르게 남편은 편안함을 느끼게 대화를 하면서 웃었고 자연스럽게 만남이 아니다 하면서 내 주변사람들과 가족들의 신뢰와 믿음을 쌓아가며 3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이어지고 막상 결혼전날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사람만 좋다고 결혼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했더니 죽어서도 사랑 한다라는 말로 나를 설득했고 피임은 하지 않고 아이가 1년 안에 생기면 같이 함께 살아보자라는 말로 서로의 합의점을 찾아갔다.
막상 의무적인 관계로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고 욕심을 버리자 3개월 만에 첫째가 생겼고 연년생 둘째가 생기면서 난산에 가까운 분만에 더 이상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도 정리가 되었고 늦동이를 낳고 싶다라는 생각은 우리 둘 다 일치했지만 친정식구들의 걱정과 둘째아이의 반대로 두 아이만 잘 키우기로 했지만 우리부부는 결혼 생활 내내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아빠는 다정다감한데 말없이 믿고 실망시킬 때 대화가 없고 화부터 내다 후회하고 엄마는 평소 말이 많고 무슨 일이 생기면 대화를 나누었으면 하는 점이 달랐다.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두 달 만에 다른 아이가 되어버리고 남편과 나는 서로의 의견이 달라서 티격태격을 하던 그날 남편 일이 몸으로 하는 일이고 나에 말을 안 듣는 것 같으면서도 걱정할거라는 불안한 마음에 전날 아들 일로 싸운 게 후회되어서 오전10시쯤 여보 우리 아들과 다시 대화 나누자 한 거 싫으면 다음에 해도 되니까 조심히 일하고 저녁에 뭐 먹고 싶은지 물어보는 문자에 남편이 알겠어, 일 끝나고 먹고 싶은 거 말할게 저녁에 봐 라는 말을 하고 아들과 소통해보려고 대화를 시도하다 친구 전화를 받고 아들이 나갔고 남자들끼리 대화도 있을 텐데 남편이 원망스러웠지만 남편 일이 워낙 몸으로 하는 일이고 두 번 말하면 잔소리로 듣고 서로의 의견차이로 화만 낼 것이라는 집안일도 손에 안 잡히고 불안했던 그 시간 핸드폰으로 “형수님 놀라지 마시고 형이 좀 다쳤는데 형수님이 오셔서 보셔야할 것 같아요 한라병원 응급실입니다” 라는 말을 듣고 아들에게 아빠 응급실에 있어 제주시 가자 라는 말에 아들이 바로 집에 들어와서 같이 제주시를 넘어가는 중에 딸이 제주방송에서 돌아오면서 소식을 듣고 놀랄 것 같아서 일단 아빠상태를 보고 판단하자라는 마음으로 응급실을 들어갔는데 머리를 꿰매는 저 사람만 아니면 좋겠다하고 두리번거릴 때 “형수님 저기 형이 있어요.” 하는 말에 눈앞이 캄캄하고 무서워서 응급실에 서있기도 힘들어서 관계자한테 안전모를 안 쓴거냐고 묻자 안전모를 쓴 상태로 펌프카 추가 전도해서 사람 팔에 맞았다고 하는 말에 그동안 남편은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까 힘든 일을 하게 되니까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서 대화조차 힘들어서 아이들 민감한 시기를 볼 수도 없었겠다라는 미안함과 아빠자리만 원하지 않았나, 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평소아들은 아빠가 강철처럼 강하다고 판단했는지 아빠상태를 보고도 크게 놀라지도 않았고 늦게 제주도에 도착한 딸이 아무 말 없이 몇 시간을 울었다. 중환자실 면회시간이 하루에 두 번 30분씩만 허용되어서 다음날 아이들 학교를 보내고 오전면회를 하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9시간을 중환자실 앞에서 기다려서 저녁면회를 하는데 남편이 하는 말 “왜 이제와 기저귀에 똥 싸기 싫어서 한 끼도 안 먹었고” 마취에서 깨어나서 발목에 주사가 터져서 간호사들 눈치 보여서 불편했다고 어린아이처럼 투정과 화가 섞인 말을 하다 배가 고프다고 죽을 사오라고 해서 편의점 죽 말고 맛있는 죽 찾으러 택시타고 3군데를 다녔는데 하필 오늘이 다 휴무여서 어쩔수 없이 편의점 죽을 가져갔는데 면회시간 끝났고 갑자기 죽을 안 먹고 가져가라고 변덕을 부리고 나오면서도 걱정이 앞섰지만 계속 중환자실에서 하염없이 있을 수 없어서 남편의 상태는 중환자실에서 몇 일 경과를 봐야하는데 남편의 고집으로 이틀 만에 일반실로 와서 와상으로 기저귀를 차고 한 달 동안 천장을 보고 살면서 수시로 다쳤던 상황이 꿈을 꾸면서 잠을 자는 게 무섭고 힘들다 했고 다친 손은 아무리 닦고 주물러줘도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두 달 입원쯤 몸을 일으키고 물리치료가 시작되었는데 빨리 낫고 싶은 마음에 심한 통증도 참고 물리치료 시간만 기다리는 남편, 착하던 아들이 다른 아이 같은 반항, 스스로 공부하고 학교생활을 즐거워하던 딸이 선생님 허락을 맡고 매일 병원을 와서 엄마 아빠를 보고 가는데 난 참 바보 같았다.
간병인을 쓰고 학생인 아이들도 케어 해야 하는데 아이들보다 남편이 낯선 사람을 불편해 할 거라는 생각이 먼저였고 한라병원에서 서귀포 재활병원으로 오면서 물리치료만으로 안 되는 팔상태가 마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수술을 할 수 있는 서울에 전문병원을 알아보면서 수술은 최대 3번까지 할 수 있지만 남편은 무리가 안 되게 2번 수술이 가능하지만 정상 팔과 신경손상이 정상인처럼 되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수술을 진행하시겠냐고 묻는 말에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해 주시는 것라면 수술을 해 주세요 했고 첫 수술 어깨 위쪽을 30cm 가량을 절개해서 실처럼 가는 신경을 이은 수술과 겨드랑이 안쪽 전체를 절개하여 수술을 하면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신경전부가 다 파손 된 게 아니고 눌러져서 신경을 세우는 수술해서 다행이라고 수술 안했으면 팔 자체를 못 쓰는 상황을 막았다고 수술 후 남편은 팔 일부의 기능이 회복되었지만 건장한 남자의 팔이 아닌 불편해진 팔 상태이고 기분 나쁜 통증과 통증약과 정신과 약 없이는 한숨도 못자고 옆에 누군가 뒤척이는 것도 팔이 부딪힐까 불안해해서 혼자 잠을 자는 게 편안한 상태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장애를 가진 남편이자 아빠가 되어버린 남편을 보면서 아들의 반항이 있을 때 엄마의 힘으로 부족 할 때는 병원생활을 하는 남편을 불렀고 아들을 잡을 수도 없고 달리면 팔이 흔들려서 통증으로 달릴 수도 없는데 아들이 아빠 말은 듣는 편이여서 남편의 도움과 자리가 절실히 필요했었지만 남편 치료는 병원생활 2년이나 되었고 병원보다 편한 집이지만 남편이 다친 후 예민하고 간단한 일상생활을 도움 주려했는데 불규칙적이고 급한 성격인 편인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혼밥을 먹겠다고 했다.
제가 보기에는 문제 상황을 덮으려는 것으로 느껴서 집안일 외에도 모든 일이 늘어 만나서 남편과 소통이 어려워서 일상생활은 내 기분대로 하는 게 아니다 라는 생각에 화도 났다가 측은하기도 했다가 남편이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아물어져서 겪은 장애는 잘 알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나도 화를 내고 있구나 싶었다.
장애란 불편한 몸만이 아닌 생각과 판단에 대한 장애가 생긴 것은 아닐까 남편은 여전히 무거운 물건을 보면 들어주다 어깨 한쪽이 축 쳐져서 기울진 몸이지만 들 수 있다고 하면서 왜 한 번에 많이 사냐고 한다.
그래서 나는 혼자 시장을 보고 해주길 바라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심한 장애가 아니어도 사고로 생긴 장애가 어느 날 갑자기 할 수 있었던 일과들을 하는데 문제가 생기고 하고자 하는 대로 안 되는 것도 마음에 장애가 생긴다는 사실에 누구 탓 남편 탓이 아닌 마음에 장애가 먼저 회복되게 위로와 응원을 상대가 원하는 것이 맞는지 생각해야겠다.
나는 남편에게 위로와 응원을 받고 싶었는데 내가 원하는 위로와 응원을 받고만 싶어 하지 않았나 나의 남편도 늘 내게 응원과 위로를 받고 싶어 했을 것이다.
장애인 아내로 살려면 그동안 당연히 해야지 하는 일을 말로하고 원망했던 마음이 있었다면 이제 나는 부탁과 협조의 언어로 바꿔서 소통하고 남편이 정신과 약 없이 잠이 들 수 있게 편안함을 주어야한다라는 마음으로 노력해 보면서 살아야 한다. 때로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마음이 편해질 수 있게 기다리는 자세로 때로는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는 지혜를 가진 아내가 되어서 남편을 지키고 내 가정의 행복을 만들어가야겠다.
[장려상] 2018년 10월 어느 날 갑자기
이 효 정
남편을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 처음 본 느낌은 못생겼지만 환하게 웃는 반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평소 이성친구들과도 동성친구들처럼 편하게 대하고 이성적인 만남이 될 것 같으면 철벽을 치고 인연을 끊는 차가운 여자였고 남자를 사귀는 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남편의 일방적인 관심도 그저 흔하고 뻔할 것 같은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던 어느 날 남편은 한결 같이 나의 불편함을 예리하게 살펴보고 필요한 물건을 말없이 두고 잇몸이 보이고 반달눈이 되게 크게 웃고 있었다.
이날 아르바이트 끝나는 마지막 날이 여서 남편에게만 마지막 날이라고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남편이 네게 관심을 보여서 인연이 되고 싶지 않아서 아르바이트 일을 끝내고 전철역에 도착했을 때 가방 안에 지하철정액권을 찾다가 쪽지를 발견했다. 남편이 네게 지하철 입구에서 만나자는 글이 있었고 왠지 얼굴보고 싫다고 해야 할 것 같아서 두리번거리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남편이 나를 보고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고 하는 말에 어차피 만날 일 없는데 예상과 다르게 남편은 편안함을 느끼게 대화를 하면서 웃었고 자연스럽게 만남이 아니다 하면서 내 주변사람들과 가족들의 신뢰와 믿음을 쌓아가며 3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이어지고 막상 결혼전날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사람만 좋다고 결혼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했더니 죽어서도 사랑 한다라는 말로 나를 설득했고 피임은 하지 않고 아이가 1년 안에 생기면 같이 함께 살아보자라는 말로 서로의 합의점을 찾아갔다.
막상 의무적인 관계로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고 욕심을 버리자 3개월 만에 첫째가 생겼고 연년생 둘째가 생기면서 난산에 가까운 분만에 더 이상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도 정리가 되었고 늦동이를 낳고 싶다라는 생각은 우리 둘 다 일치했지만 친정식구들의 걱정과 둘째아이의 반대로 두 아이만 잘 키우기로 했지만 우리부부는 결혼 생활 내내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아빠는 다정다감한데 말없이 믿고 실망시킬 때 대화가 없고 화부터 내다 후회하고 엄마는 평소 말이 많고 무슨 일이 생기면 대화를 나누었으면 하는 점이 달랐다.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두 달 만에 다른 아이가 되어버리고 남편과 나는 서로의 의견이 달라서 티격태격을 하던 그날 남편 일이 몸으로 하는 일이고 나에 말을 안 듣는 것 같으면서도 걱정할거라는 불안한 마음에 전날 아들 일로 싸운 게 후회되어서 오전10시쯤 여보 우리 아들과 다시 대화 나누자 한 거 싫으면 다음에 해도 되니까 조심히 일하고 저녁에 뭐 먹고 싶은지 물어보는 문자에 남편이 알겠어, 일 끝나고 먹고 싶은 거 말할게 저녁에 봐 라는 말을 하고 아들과 소통해보려고 대화를 시도하다 친구 전화를 받고 아들이 나갔고 남자들끼리 대화도 있을 텐데 남편이 원망스러웠지만 남편 일이 워낙 몸으로 하는 일이고 두 번 말하면 잔소리로 듣고 서로의 의견차이로 화만 낼 것이라는 집안일도 손에 안 잡히고 불안했던 그 시간 핸드폰으로 “형수님 놀라지 마시고 형이 좀 다쳤는데 형수님이 오셔서 보셔야할 것 같아요 한라병원 응급실입니다” 라는 말을 듣고 아들에게 아빠 응급실에 있어 제주시 가자 라는 말에 아들이 바로 집에 들어와서 같이 제주시를 넘어가는 중에 딸이 제주방송에서 돌아오면서 소식을 듣고 놀랄 것 같아서 일단 아빠상태를 보고 판단하자라는 마음으로 응급실을 들어갔는데 머리를 꿰매는 저 사람만 아니면 좋겠다하고 두리번거릴 때 “형수님 저기 형이 있어요.” 하는 말에 눈앞이 캄캄하고 무서워서 응급실에 서있기도 힘들어서 관계자한테 안전모를 안 쓴거냐고 묻자 안전모를 쓴 상태로 펌프카 추가 전도해서 사람 팔에 맞았다고 하는 말에 그동안 남편은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까 힘든 일을 하게 되니까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서 대화조차 힘들어서 아이들 민감한 시기를 볼 수도 없었겠다라는 미안함과 아빠자리만 원하지 않았나, 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평소아들은 아빠가 강철처럼 강하다고 판단했는지 아빠상태를 보고도 크게 놀라지도 않았고 늦게 제주도에 도착한 딸이 아무 말 없이 몇 시간을 울었다. 중환자실 면회시간이 하루에 두 번 30분씩만 허용되어서 다음날 아이들 학교를 보내고 오전면회를 하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9시간을 중환자실 앞에서 기다려서 저녁면회를 하는데 남편이 하는 말 “왜 이제와 기저귀에 똥 싸기 싫어서 한 끼도 안 먹었고” 마취에서 깨어나서 발목에 주사가 터져서 간호사들 눈치 보여서 불편했다고 어린아이처럼 투정과 화가 섞인 말을 하다 배가 고프다고 죽을 사오라고 해서 편의점 죽 말고 맛있는 죽 찾으러 택시타고 3군데를 다녔는데 하필 오늘이 다 휴무여서 어쩔수 없이 편의점 죽을 가져갔는데 면회시간 끝났고 갑자기 죽을 안 먹고 가져가라고 변덕을 부리고 나오면서도 걱정이 앞섰지만 계속 중환자실에서 하염없이 있을 수 없어서 남편의 상태는 중환자실에서 몇 일 경과를 봐야하는데 남편의 고집으로 이틀 만에 일반실로 와서 와상으로 기저귀를 차고 한 달 동안 천장을 보고 살면서 수시로 다쳤던 상황이 꿈을 꾸면서 잠을 자는 게 무섭고 힘들다 했고 다친 손은 아무리 닦고 주물러줘도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두 달 입원쯤 몸을 일으키고 물리치료가 시작되었는데 빨리 낫고 싶은 마음에 심한 통증도 참고 물리치료 시간만 기다리는 남편, 착하던 아들이 다른 아이 같은 반항, 스스로 공부하고 학교생활을 즐거워하던 딸이 선생님 허락을 맡고 매일 병원을 와서 엄마 아빠를 보고 가는데 난 참 바보 같았다.
간병인을 쓰고 학생인 아이들도 케어 해야 하는데 아이들보다 남편이 낯선 사람을 불편해 할 거라는 생각이 먼저였고 한라병원에서 서귀포 재활병원으로 오면서 물리치료만으로 안 되는 팔상태가 마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수술을 할 수 있는 서울에 전문병원을 알아보면서 수술은 최대 3번까지 할 수 있지만 남편은 무리가 안 되게 2번 수술이 가능하지만 정상 팔과 신경손상이 정상인처럼 되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수술을 진행하시겠냐고 묻는 말에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해 주시는 것라면 수술을 해 주세요 했고 첫 수술 어깨 위쪽을 30cm 가량을 절개해서 실처럼 가는 신경을 이은 수술과 겨드랑이 안쪽 전체를 절개하여 수술을 하면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신경전부가 다 파손 된 게 아니고 눌러져서 신경을 세우는 수술해서 다행이라고 수술 안했으면 팔 자체를 못 쓰는 상황을 막았다고 수술 후 남편은 팔 일부의 기능이 회복되었지만 건장한 남자의 팔이 아닌 불편해진 팔 상태이고 기분 나쁜 통증과 통증약과 정신과 약 없이는 한숨도 못자고 옆에 누군가 뒤척이는 것도 팔이 부딪힐까 불안해해서 혼자 잠을 자는 게 편안한 상태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장애를 가진 남편이자 아빠가 되어버린 남편을 보면서 아들의 반항이 있을 때 엄마의 힘으로 부족 할 때는 병원생활을 하는 남편을 불렀고 아들을 잡을 수도 없고 달리면 팔이 흔들려서 통증으로 달릴 수도 없는데 아들이 아빠 말은 듣는 편이여서 남편의 도움과 자리가 절실히 필요했었지만 남편 치료는 병원생활 2년이나 되었고 병원보다 편한 집이지만 남편이 다친 후 예민하고 간단한 일상생활을 도움 주려했는데 불규칙적이고 급한 성격인 편인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혼밥을 먹겠다고 했다.
제가 보기에는 문제 상황을 덮으려는 것으로 느껴서 집안일 외에도 모든 일이 늘어 만나서 남편과 소통이 어려워서 일상생활은 내 기분대로 하는 게 아니다 라는 생각에 화도 났다가 측은하기도 했다가 남편이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아물어져서 겪은 장애는 잘 알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나도 화를 내고 있구나 싶었다.
장애란 불편한 몸만이 아닌 생각과 판단에 대한 장애가 생긴 것은 아닐까 남편은 여전히 무거운 물건을 보면 들어주다 어깨 한쪽이 축 쳐져서 기울진 몸이지만 들 수 있다고 하면서 왜 한 번에 많이 사냐고 한다.
그래서 나는 혼자 시장을 보고 해주길 바라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심한 장애가 아니어도 사고로 생긴 장애가 어느 날 갑자기 할 수 있었던 일과들을 하는데 문제가 생기고 하고자 하는 대로 안 되는 것도 마음에 장애가 생긴다는 사실에 누구 탓 남편 탓이 아닌 마음에 장애가 먼저 회복되게 위로와 응원을 상대가 원하는 것이 맞는지 생각해야겠다.
나는 남편에게 위로와 응원을 받고 싶었는데 내가 원하는 위로와 응원을 받고만 싶어 하지 않았나 나의 남편도 늘 내게 응원과 위로를 받고 싶어 했을 것이다.
장애인 아내로 살려면 그동안 당연히 해야지 하는 일을 말로하고 원망했던 마음이 있었다면 이제 나는 부탁과 협조의 언어로 바꿔서 소통하고 남편이 정신과 약 없이 잠이 들 수 있게 편안함을 주어야한다라는 마음으로 노력해 보면서 살아야 한다. 때로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마음이 편해질 수 있게 기다리는 자세로 때로는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는 지혜를 가진 아내가 되어서 남편을 지키고 내 가정의 행복을 만들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