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내가 살고 있는 제주가 삼면의 바다로 둘러 싸여 있긴 하지만 모든 걸 받아 주는 어머니 품처럼 바다는 나의 모든 걸 받아 주는 것 같았다.
그런 어머니는 이젠 내 곁에 안 계신다. 그래서 힘든 일이 있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땐 자가용을 끌고 무작정 바다로 달려가곤 했다. 어머니에게 하소연 하러 가듯, 그리움을 안고.
나는 8남매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나 형제들 중에서도 제일 빨리 걸었고 언니, 오빠들의 사랑을 받으며 건강하게 자랐다고 한다.
1953년 7월 어느 더운 여름. 어머니는 열이 40도로 넘게 올라가고 이유 없이 울어대는 갓 돌을 넘은 나를 업고 병원에 달려가서 주사를 맞게 하셨다. 어머니는 주사를 맞고 당연히 나을 거라 기대하셨지만 그게 딸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아픔인걸 아셨을 때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하셨을지 지금 생각해 보면 가슴이 미어온다.
어렸을 때 나는 오른쪽 다리가 불편 한 줄도 모르고 마음대로 뛰어 놀았으며 못 가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못하는 것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체육시간에는 혼자 교실에 있어야 했고 친구들과 뛰어 놀 때는 친구들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멀리 가는 소풍 때는 친구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도 들 수 없어서 헌 옷을 비옷 삼아 쓰고 다녔다. 하루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학교를 가다가 물웅덩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해서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난 악착같이 초등학교 6년 동안 결석을 3번밖에 하지 않았고 정근상을 받으며 졸업을 했다.
절름뱅이라고 놀림을 받고 넘어지면 쳐다보는 사람이 많아도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무난하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시험을 보게 되었다. 집이 하효여서 가까운 서귀포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갈 거라 생각을 하겠지만 집에서 가까운 20여분 거리도 나에겐 불편한 거리였다.
그때는 버스가 교통수단이라 서귀포에 한번 나가려 해도 만원인 버스에 앉을 자리, 한쪽다리로 서 있을 수가 없었으며 학교 바로 앞에 버스가 정차하지도 않아서 서귀포에 있는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작은언니의 추천과 부모님을 설득시켜줘서 집을 학교 가까이에 빌어 자취하면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제주시 신성여자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식구들과 떨어져서 나 혼자 살아 본 적도 없었고 촌에서 제주시 학교로 가니 외로웠다. 그러면서 다시 내가 장애가 있다는 것에 창피함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에 먼저 학교에 가고 제일 늦게 하교하며 남의 눈을 피해가며 학교를 다녔다.
신성여자고등학교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여서 자연스레 고2때부터 성당을 다니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모든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이었고 나를 놀리는 것도 쳐다보는 것도 없이 다른 친구들과 같이 재미있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3때 나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진학 책을 읽다가 장애인은 자기가 가고픈 대학에는 들어 갈 수가 없다는 글을 읽고 3일을 결석하며 울기만 했다. 그 때 담임선생님이 좋은 곳에 진학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자고 하셨지만 모든 게 다 싫었다. 집에서는 열심히 공부해서 약대를 갔으면 했지만 내 이름 말고 장애인이라는 꼬리표로 가고픈 대학교를 진학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난 모든 걸 다 포기해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1970년대에는 다들 먹고 살기 어려운 시기로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시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집에서 밥순이로 전락됐다. 다른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은행으로 학교 서무과로 여기저기 취직하고 다니는데 난 집에서 부모님만 원망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내고 양재를 배워 보려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서울로 가게 되었다. 인류양재학원에서 재단법을 배우고 취직을 해야 하는데 장애가 있는 나를 어디에서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양재는 취직을 하고 시다로 몇 년을 배워야 본인의 양장점을 차릴 수 있다고 했다. 발품을 팔며 여러 군데 돌아다니다 겨우 양장점에 들어 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무보수로 열심히 하겠다는 계약서를 쓰고서야 일을 할 수 있었다. 월급 없이 밥만 해결하고 재단하는 탁자에서 잠을 자면서 가족을 그리워할 시간도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고향에 내려 와서 작은 양장점을 차렸다. 촌에서는 재단도 미싱도 다 자기가 해야 하는데 재봉틀 페달 밟기가 힘든 나로서는 미싱사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미싱사를 구하기가 정말 힘이 들었다. 결국 양장점은 1년을 못하고 접어야 했다. 대학교를 진학 못하고 선택한 길이였고 힘들게 배워 한 일이였는데 이렇게 끝을 내서 절망스러웠다. 정말 내가 할 것이 없을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봤지만 모든 게 나의 용기가 필요한 것뿐이었다. 집에서 죽는 날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끔 주일마다 효돈 공소에 미사를 갔었는데 공소 회장님이 나에게 피아노를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새로 부임하신 교장선생님 딸이랑 친구여서 학교에서 풍금을 가끔 쳐 본 게 전부였던 나에게 피아노는 생소하게 다가왔고 가슴 설레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회장님께서는 피아노를 가르쳐 줄 선생님까지 소개시켜줬다. 죽으란 법은 없고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는가 보다 생각하고 이번엔 열심히 공부하고 내 삶이 다 할 때까지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실력이 쌓여가고 선생님도 잘 하고 있으니 피아노교습소를 차려 보라고 권했다. 과연 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지만 아름다운 음률을 매일 듣고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이 떨려왔다. 하지만 그 때 당시 피아노 값이 만만치 않았다. 그동안 내가 벌어 놓은 돈도 없었고 부모님께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촌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그런 큰돈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결국 아버지께서 피아노 구입하는 돈을 마련해 주셨다. 그 뒤엔 어머니의 설득이 있었다. 어머니는 딸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하고 싶은 일도 못 할 거라 생각하니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아버지에게 얼마나 많이 빌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께 더 살갑게 말하고 찾아뵙고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못했을까 나를 원망해 본다.
피아노교습소를 차리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수학에 자신 있던 나는 연산도 같이 배워줬다. 그때부터 성당에서 미사 반주도 하면서 난 생활의 활력을 받아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다. 결혼 적령기가 되니 친구들은 하나둘씩 결혼을 하는데 나는 나의 장애 때문에 마음대로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어떤 남자를 만날까.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할까. 만약 결혼하면 아이들은 내가 키울 수 있을까. 나를 원망하진 않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결론은 결혼을 포기하고 혼자 살려고 부모님을 졸라 1980년도에 서귀포 시내로 이사를 했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즐겁게 지냈다. 그때 제자들이 지금 피아노학원을 하고 있는데 대학 진학도 못한 나에게 제자가 있고 그 제자들이 다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게 대견하고 기분이 좋다.
그렇게 지내던 나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고향 친척분의 소개로 나를 찾아 온 것이었다. 지금까지 남자를 만나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떨리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다가 왔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겠노라고 마음을 먹고 열심히 살아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국 하느님께 의지했다. 하느님이 정해주시면 그대로 따르겠노라고. 기도할 때마다 그 남자가 생각이 나고 헤어질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 나이 29살에 동갑인 남편과 성당에서 축복 속에 혼배를 하고 1남 1녀를 낳았다. 남편이 옆에서 잘 돌봐 주어 병치레 없이 잘 자라 주었고 내가 업지 못하니 유모차가 내 등이 되어 방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재우면서 피아노교습소 일을 계속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부모 회의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나로 인해 힘들어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못난 엄마처럼 보이기 싫어서 성당 봉사 팀을 꾸려 장애인시설 빨래 봉사도 다녔다.
사회는 발달하고 멋진 건물에 지어진 피아노학원이 생기면서 피아노 배우는 학생들이 많이 빠져 나갔다. 그 후로 피아노교습소 문을 닫았다.
계속 일을 하다가 쉬게 되니 다시 무기력 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50대에 난 다시 구직의 문을 두드렸다. 시청 홈페이지에 장애인일자리사업 홍보 글이 올라왔고 장애인일자리를 하게 되었다. 작은 월급이지만 지금까지 일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지체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활동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를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제대로 된 운동을 해 본적이 없던 나는 파크골프를 배워 도민체전이나 장애인생활체육대회에도 출전하게 되었다. 사물놀이도 배웠는데 피아노만 치던 내가 장구채를 들고 신명나게 놀았다. 각종 행사에 식전공연으로 출연하며 나의 자존감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2015년도에는 퀼트 공예를 배우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사회생활을 했던 양재를 배우던 생각이 났고 그때의 떨림이 다시 느껴졌다. 퀼트에 매료되기 시작하였다. 조각 천을 이용해서 키홀더, 파우치, 가방 등을 만들면서 지인들에게도 나눠주었다. 잘 만든다는 지인들은 나에게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하기도 했다. 두 손으로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 어쩌면 나에게 가장 알맞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열심히 낮이나 밤이나 열심히 만들고 선물도 하면서 나의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지금은 코로나로 중단되었지만 2019년도부터 이중섭 거리 ‘작가의 산책길 문화예술시장 상품판매대 운영’에서 부스를 선정 받아 퀼트 작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예쁘다며 물건을 사는 사람들을 볼 때면 으쓱해지기도 했다.
나의 친한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언니는 손재주가 좋아서 피아노도 잘 치고 퀼트도 예쁘게 만들고. 지금 나이에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하니까 손이 금손이우다. 부럽수다’ 하면서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오른쪽 다리의 장애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이 두 손으로 다 할 수 있었다. 하느님이 정해 준, 어쩌면 나의 숙명인가 생각한다.
이제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나이가 되어간다. 돌아가실 때까지 자나 깨나 내 걱정이었는데 부모님께서 살아 계실 때는 심한 말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원망을 많이 했었다. 지금도 부모님께서는 나를 걱정하고 계실지 모른다.
그러나 말하고 싶다.
부모님께서 저를 사랑으로 키우셨기에 저 경애는 내 인생의 후회 없이 박수를 보내며 열심히 살았고 살아 갈 거라고.
[우수상] 내 인생의 박수
강 경 애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내가 살고 있는 제주가 삼면의 바다로 둘러 싸여 있긴 하지만 모든 걸 받아 주는 어머니 품처럼 바다는 나의 모든 걸 받아 주는 것 같았다.
그런 어머니는 이젠 내 곁에 안 계신다. 그래서 힘든 일이 있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땐 자가용을 끌고 무작정 바다로 달려가곤 했다. 어머니에게 하소연 하러 가듯, 그리움을 안고.
나는 8남매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나 형제들 중에서도 제일 빨리 걸었고 언니, 오빠들의 사랑을 받으며 건강하게 자랐다고 한다.
1953년 7월 어느 더운 여름. 어머니는 열이 40도로 넘게 올라가고 이유 없이 울어대는 갓 돌을 넘은 나를 업고 병원에 달려가서 주사를 맞게 하셨다. 어머니는 주사를 맞고 당연히 나을 거라 기대하셨지만 그게 딸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아픔인걸 아셨을 때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하셨을지 지금 생각해 보면 가슴이 미어온다.
어렸을 때 나는 오른쪽 다리가 불편 한 줄도 모르고 마음대로 뛰어 놀았으며 못 가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못하는 것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체육시간에는 혼자 교실에 있어야 했고 친구들과 뛰어 놀 때는 친구들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멀리 가는 소풍 때는 친구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도 들 수 없어서 헌 옷을 비옷 삼아 쓰고 다녔다. 하루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학교를 가다가 물웅덩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해서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난 악착같이 초등학교 6년 동안 결석을 3번밖에 하지 않았고 정근상을 받으며 졸업을 했다.
절름뱅이라고 놀림을 받고 넘어지면 쳐다보는 사람이 많아도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무난하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시험을 보게 되었다. 집이 하효여서 가까운 서귀포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갈 거라 생각을 하겠지만 집에서 가까운 20여분 거리도 나에겐 불편한 거리였다.
그때는 버스가 교통수단이라 서귀포에 한번 나가려 해도 만원인 버스에 앉을 자리, 한쪽다리로 서 있을 수가 없었으며 학교 바로 앞에 버스가 정차하지도 않아서 서귀포에 있는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작은언니의 추천과 부모님을 설득시켜줘서 집을 학교 가까이에 빌어 자취하면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제주시 신성여자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식구들과 떨어져서 나 혼자 살아 본 적도 없었고 촌에서 제주시 학교로 가니 외로웠다. 그러면서 다시 내가 장애가 있다는 것에 창피함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에 먼저 학교에 가고 제일 늦게 하교하며 남의 눈을 피해가며 학교를 다녔다.
신성여자고등학교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여서 자연스레 고2때부터 성당을 다니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모든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이었고 나를 놀리는 것도 쳐다보는 것도 없이 다른 친구들과 같이 재미있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3때 나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진학 책을 읽다가 장애인은 자기가 가고픈 대학에는 들어 갈 수가 없다는 글을 읽고 3일을 결석하며 울기만 했다. 그 때 담임선생님이 좋은 곳에 진학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자고 하셨지만 모든 게 다 싫었다. 집에서는 열심히 공부해서 약대를 갔으면 했지만 내 이름 말고 장애인이라는 꼬리표로 가고픈 대학교를 진학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난 모든 걸 다 포기해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1970년대에는 다들 먹고 살기 어려운 시기로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시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집에서 밥순이로 전락됐다. 다른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은행으로 학교 서무과로 여기저기 취직하고 다니는데 난 집에서 부모님만 원망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내고 양재를 배워 보려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서울로 가게 되었다. 인류양재학원에서 재단법을 배우고 취직을 해야 하는데 장애가 있는 나를 어디에서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양재는 취직을 하고 시다로 몇 년을 배워야 본인의 양장점을 차릴 수 있다고 했다. 발품을 팔며 여러 군데 돌아다니다 겨우 양장점에 들어 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무보수로 열심히 하겠다는 계약서를 쓰고서야 일을 할 수 있었다. 월급 없이 밥만 해결하고 재단하는 탁자에서 잠을 자면서 가족을 그리워할 시간도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고향에 내려 와서 작은 양장점을 차렸다. 촌에서는 재단도 미싱도 다 자기가 해야 하는데 재봉틀 페달 밟기가 힘든 나로서는 미싱사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미싱사를 구하기가 정말 힘이 들었다. 결국 양장점은 1년을 못하고 접어야 했다. 대학교를 진학 못하고 선택한 길이였고 힘들게 배워 한 일이였는데 이렇게 끝을 내서 절망스러웠다. 정말 내가 할 것이 없을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봤지만 모든 게 나의 용기가 필요한 것뿐이었다. 집에서 죽는 날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끔 주일마다 효돈 공소에 미사를 갔었는데 공소 회장님이 나에게 피아노를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새로 부임하신 교장선생님 딸이랑 친구여서 학교에서 풍금을 가끔 쳐 본 게 전부였던 나에게 피아노는 생소하게 다가왔고 가슴 설레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회장님께서는 피아노를 가르쳐 줄 선생님까지 소개시켜줬다. 죽으란 법은 없고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는가 보다 생각하고 이번엔 열심히 공부하고 내 삶이 다 할 때까지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실력이 쌓여가고 선생님도 잘 하고 있으니 피아노교습소를 차려 보라고 권했다. 과연 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지만 아름다운 음률을 매일 듣고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이 떨려왔다. 하지만 그 때 당시 피아노 값이 만만치 않았다. 그동안 내가 벌어 놓은 돈도 없었고 부모님께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촌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그런 큰돈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결국 아버지께서 피아노 구입하는 돈을 마련해 주셨다. 그 뒤엔 어머니의 설득이 있었다. 어머니는 딸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하고 싶은 일도 못 할 거라 생각하니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아버지에게 얼마나 많이 빌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께 더 살갑게 말하고 찾아뵙고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못했을까 나를 원망해 본다.
피아노교습소를 차리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수학에 자신 있던 나는 연산도 같이 배워줬다. 그때부터 성당에서 미사 반주도 하면서 난 생활의 활력을 받아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다. 결혼 적령기가 되니 친구들은 하나둘씩 결혼을 하는데 나는 나의 장애 때문에 마음대로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어떤 남자를 만날까.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할까. 만약 결혼하면 아이들은 내가 키울 수 있을까. 나를 원망하진 않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결론은 결혼을 포기하고 혼자 살려고 부모님을 졸라 1980년도에 서귀포 시내로 이사를 했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즐겁게 지냈다. 그때 제자들이 지금 피아노학원을 하고 있는데 대학 진학도 못한 나에게 제자가 있고 그 제자들이 다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게 대견하고 기분이 좋다.
그렇게 지내던 나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고향 친척분의 소개로 나를 찾아 온 것이었다. 지금까지 남자를 만나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떨리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다가 왔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겠노라고 마음을 먹고 열심히 살아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국 하느님께 의지했다. 하느님이 정해주시면 그대로 따르겠노라고. 기도할 때마다 그 남자가 생각이 나고 헤어질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 나이 29살에 동갑인 남편과 성당에서 축복 속에 혼배를 하고 1남 1녀를 낳았다. 남편이 옆에서 잘 돌봐 주어 병치레 없이 잘 자라 주었고 내가 업지 못하니 유모차가 내 등이 되어 방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재우면서 피아노교습소 일을 계속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부모 회의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나로 인해 힘들어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못난 엄마처럼 보이기 싫어서 성당 봉사 팀을 꾸려 장애인시설 빨래 봉사도 다녔다.
사회는 발달하고 멋진 건물에 지어진 피아노학원이 생기면서 피아노 배우는 학생들이 많이 빠져 나갔다. 그 후로 피아노교습소 문을 닫았다.
계속 일을 하다가 쉬게 되니 다시 무기력 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50대에 난 다시 구직의 문을 두드렸다. 시청 홈페이지에 장애인일자리사업 홍보 글이 올라왔고 장애인일자리를 하게 되었다. 작은 월급이지만 지금까지 일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지체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활동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를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제대로 된 운동을 해 본적이 없던 나는 파크골프를 배워 도민체전이나 장애인생활체육대회에도 출전하게 되었다. 사물놀이도 배웠는데 피아노만 치던 내가 장구채를 들고 신명나게 놀았다. 각종 행사에 식전공연으로 출연하며 나의 자존감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2015년도에는 퀼트 공예를 배우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사회생활을 했던 양재를 배우던 생각이 났고 그때의 떨림이 다시 느껴졌다. 퀼트에 매료되기 시작하였다. 조각 천을 이용해서 키홀더, 파우치, 가방 등을 만들면서 지인들에게도 나눠주었다. 잘 만든다는 지인들은 나에게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하기도 했다. 두 손으로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 어쩌면 나에게 가장 알맞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열심히 낮이나 밤이나 열심히 만들고 선물도 하면서 나의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지금은 코로나로 중단되었지만 2019년도부터 이중섭 거리 ‘작가의 산책길 문화예술시장 상품판매대 운영’에서 부스를 선정 받아 퀼트 작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예쁘다며 물건을 사는 사람들을 볼 때면 으쓱해지기도 했다.
나의 친한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언니는 손재주가 좋아서 피아노도 잘 치고 퀼트도 예쁘게 만들고. 지금 나이에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하니까 손이 금손이우다. 부럽수다’ 하면서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오른쪽 다리의 장애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이 두 손으로 다 할 수 있었다. 하느님이 정해 준, 어쩌면 나의 숙명인가 생각한다.
이제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나이가 되어간다. 돌아가실 때까지 자나 깨나 내 걱정이었는데 부모님께서 살아 계실 때는 심한 말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원망을 많이 했었다. 지금도 부모님께서는 나를 걱정하고 계실지 모른다.
그러나 말하고 싶다.
부모님께서 저를 사랑으로 키우셨기에 저 경애는 내 인생의 후회 없이 박수를 보내며 열심히 살았고 살아 갈 거라고.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